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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 소통과 헌신의 리더십
- 백성들의 평범한 생활을 위한 비범한 노력
1. 왕의 조건은 스스로 갖추는 것이다.
- 인심을 잃지 않는 것
- 자기 절제력과 치우지지 않는 공적인 태도
- 어떤 정치세력에도 얽매이지 않는 독자성
- 스스로 돌이켜 반성하는 태도
- 창조적인 대안 제시능력 : (고전의 문헌적 근거와 역사적 사례를 들어가며 제시 + 정치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
- 조선의 국제정치적 지위와 대외정책 노선을 간파하고 계승하려 했다(중원 대륙의 패권국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국가의 안위
는 달라졌다.)
2. 근본적으로 왕의 비극적 종말은 국왕이 신하들로부터 고립된 데서 비롯된다고 본다. 대부분의 국왕은 즉위 초에 좋은 정치, 즉 천명
을 따르고 백성들의 여먕에 부합하며, 사대부들의 공론에 맞는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비유하자면 '정치의 무게중심'이 국왕의
몸 밖 - 특히 사대부의 공론과 민심- 에 존재한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고 권력의 부력에 부풀리기 시작하면서 '정치의 무게중심'
이 왕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말과 판단과 결정이 국왕 자신에게서 나오게 되면서, 국왕은 자신도 모르게 고립된다.
"임금이 임금됨을 어렵게 여기며, 신하가 신하됨을 어렵게 여겨야 정사가 비로서 다스려져서 일반백성이 그 덕을 입게된다" 는
말처럼 세종 같은 국왕은 끊임없이 '정치의 무게중심'을 밖에 두고,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자세를 지니려고 했다.
3.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배움에서 비롯된다.
역설적으로 제왕학의 커리큘럼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잡다한 공부를 시킨 것이 오히려 세종의 균형잡힌 시각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
결론적으로 세종은 성리학의 경전은 물론이고 역사와 과학, 음악 서적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한 학자군주였다. 그는 '경서와 사서에
있어서 두루 보지 않은 것이 없고'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지난 시점에도 "오히려 그만둘 수 없다"고 회고 했다. 그 이유로 그는 "책을
보는 중에 그로 말미암아 생각이 떠올라서 정사에 시행하는 것이 많기 때문" 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세종이 혼자서 독서한 것이 아니라, 신료들과 함께 경연에서 책을 읽고 토론했다는 것이다.
고전에 들어있는 풍부한 말과 아이디어에서 회의를 시작하여, 점차 당면한 일을 함께 논의하고, 그 과정에서 세종이 그랬던 것처럼
'의외로 뛰어난 소견'을 얻는 방식은 어떨까 ?
4. 공적으로 허물을 덮게 하라.
인재는 천하 국가의 지극한 보배
진짜 인재와 인재인 척하는 자들은 늘 섞여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것을 구분해 쓰는 방법이 중요하다.
5. 국왕이 인재를 등용하지 못하는 이유
-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
- 인재를 절실하게 구하지 않기 때문
- 국왕과 인재의 뜻이 합치되지 못할 경우
만약 국왕이 두루 인재를 구하되 절실한 마음을 갖고, 비록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도라도 국가를 위해 등용한다면 인재는 언제든지
구해 쓸 수 있다는 것이 세종의 생각이였다. 한 마디로 인재 등용의 요체는 국왕의 마음먹기와 태도 여하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6. 인재등용에 대해 당시 장원으로 급제한 강희맹의 답안
"세상에는 완전한 사람은 없다. 따라서 적합한 자리에 기용해 인재로 키워야 한다. 그리고 전능한 사람도 없다. 따라서 적당한 일을
맡겨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 사람의 결점만 지적하고 허물만 적발한다면,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벗어날 수
가 없게 된다. 따라서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는 것"이 인재를 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데, 이렇게 하면 "탐욕스러운 사람이든
청렴한 사람이든 모두 부릴 수"가 있다. 실제로 세종은 일관되게 '장점을 취하는' 인사정책을 폈다.
7. 세종의 말 가운데 중요한 부분은 영의정은 '일'과 함께 '말'도 잘해야 한다는 대목이다. 일심봉공하는 자세로 일을 성공적으로 잘해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국가가 지금 하는 일이 백성와 임금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를 적절히 설명하고
설득하는 능력이다. '정치'는 모름지기 '행정'의 범위를 넘어서는 의미와 소통의 영역에 잇닿아 있기 때문이다.
8. 조선 최고의 지식 경영자 세종
- 지식경영이란 관련된 사안 내지 사건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지식을 어떻게 획득하고, 획득한 것을 최대한 활용해 최상의 결정을
내리는 경세의 능력이라 할 수 있다.
- 지식경영은 최고경영자 내지 최종 판단자의 경영방침과 결정내용을 조직구성원들이 '권위있는것' 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지적능력
을 뜻한다. 아무리 좋은 방침과 결정이라 할지라도 구성원들의 신뢰와 지지를 얻지 못하면 추진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 세종은 중요한 판단을 내리고 정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그 당시의 정보와 지식을 최대한 활용했고 최고의 지적능력으로 구성원
들의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냈던 지식경영자라고 할 수 있다.
9. 그가 활용했던 집현전
- 집현, 즉 '인재를 모아서' 기르는 기능
- 서적수집과 보관, 그리고 편찬 기능
- 경연 등에서 국왕과 함께 학문적 토론을 하고, 정책적 자문을 하는곳
10. 경영은 '말' 을 맡은 언관과 '일'을 책임진 재상들이 함께 앉아서 당면 과제를 풀어가는 독특한 회의 방식인데, 세종은 경연이라는
공론장을 집현전 학사들의 힘을 얻어 이끌어갔다.
11. 세종의 싱크탱크, 집현전
정조시대와 세종시대를 공부하면서 우리 역사의 전성기에 나타나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국책연구기관이라 할 수 있는
싱크탱그의 효과적인 활용이다. 밤이면 불을 켜고 당시 새로 들어온 성리학 서적을 함께 읽고, 절망적이던 국가와 사회를 구해낼
정치적 비전을 발견했을때 느낀 말할 수 없는 감격, 그리고 언제나 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자고 맹세하는 모습들이 느껴진다.
12. 연구란 온축(蘊蓄)의 시간을 필요로 하고 숙성되고 정제된 자료만이 "나라를 위해 소용" 된다고 보고 학사들이 다른 관청으로
옮기는 것을 억제한 세종의 정책
13. 경영의 운영방식 (정조와 세종의 비교)
정조가 스스로 군사, 즉 임금이자 스승을 자부하며 "신하를 가르칠 상대로 삼기 좋아"한 임금이었던데 비해 세종은 주로 신료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했다. 정조는 고전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하여 강의를 마칠때 까지 시종 주도권
을 쥐고 있었다. 간간히 신하들이 "전하의 정성이 모자라서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라고 비판의 실마리를 잡아보지만 곧 국왕의
박학과 다언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결국 신하들은 "명심하겠습니다" 라든지, "소신들이 미칠 바가 아니옵니다" 라고 하는 수준에서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였다.
이에 비해 세종은 경연에서 자신이 던진 질문에 경연관들이 대답을 하지 못하면 오히려 그들을 다독이곤했다. "무릇 배우는 자들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대들은 알지 못하는 혐의쩍게 여기지 말라" 고 격려했다. 정밀하게 익히고 관통하여
"얻음" 이 있는 공부가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정조는 경연 등에서 신하들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다변의 정치가였다. 이 때문에 그는 왕언의 체재는 간명하고 중후해야 하는데
전교를 내릴 때마다 한 종이의 열 줄에 정녕히 반복하여 조금도 남겨두지 않고 말을 번거롭게 되풀이 한다. 는 신하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에 비해 세종은 대체로 신하들에게 과제를 주고서 "함께 의논하여 아뢰라"고 하거나, 주로 신하들의 말을 듣는편
이었다.
14. 처음엔 반대하다가도 토론 과정에서 자기주장을 바꾸는 경우와, 일을 위임받은 다음엔 '마치 처음부터 찬성했던 것처럼' 그 일을
책임지고 추진하는 사람을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세종 시대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15. 허조의 반대는 회의참석자들의 집단적 착각, 즉 집단적 사고를 방지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허조를 배제하지 않고 계속
회의에 참여해서 말하게한 세종의 자세도 놀랍다. 세종은 '허조는 고집불통이야' 라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늘 끝까지
그의 의견을 경청했고, 제기된 문제점을 해결한 뒤에야 그 정책을 시행하곤 했다. 토론을 통해 사전에 문제점을 발견하고 예방한
것이다. 사실 세종의 회의방식은 간단했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고 문제를 던져놓고, 찬반 토론을 거듭한다. 이 때문에 회의시간은
다소 길어졌지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이 거의 다 드러나곤 했다.
16. "황희 말대로 하라!" - 세종실록에서 번번히 찾아볼 수 있는 이 말은 좋은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방식으로, 세종 특유의 회의방식
17. 세종의 위민정치
- 과연 정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냐 하는 인식의 차이
- 그는 백성들로 하여금 직접 자신의 말을 읽고 쓸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 했다. 이것은 뒤의 세제개혁
과정에서 나타난 백성들의 여론조사와 함께 세종의 정치관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 세종은 강무를 주관하며 오가는 길에서 백성들의 목소리를 가까이에서 들으려 노력했다. 군사훈련에 몸소 참여하고, 백성들을
만남으로써 문무를 겸전한 군주의 위용과 위민정치의 실제를 보여주었다.
18. 세종의 개혁
-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면 늘 개혁을 내세운다. 하지만 정작 무엇을 위한 개혁인지, 그리고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 그 방식에 대한
성찰은 그리 진지하지 않은 것 같다.
- 공법도입 : 공법을 제정,시행하는 과정인데 놀랍게도 세종은 무려 17년간(1427 ~ 1944)의 긴 토론을 거쳐, 3단계의 과정을 거치면서
반대자들까지도 그 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시행에 들어갔다.
19. 숙의정치와 개혁 성공의 조건 (세제를 개혁하는 과정에 발견되는 '한국형 공론조사'
- 먼저 이해당사자들의 찬반 의향을 폭넓게 물어보는 수량적인 여론조사를 거친다음
- 그 문제에 대해서 좀더 잘 알고 있는 선별된 식견을 가진 사람들의 실제적인 근거에 입각한 찬반 토론을 거친 질적인 공론조사를 하고
- 마지막으로 '정치세계의 우연성'을 고려한 가운데 신중하고 책임 있는 국무위원들이 최종 결정을 내릴 때, 행정적 시행착오와 사회적
저항을 최소화
20. 세종은 자신의 시대를 "수성기"로 인식하고 있었다. 수성기란 창업-수성-경장-쇠퇴 라는 동양사상의 체계순환론에서 두 번째 단계로,
혁명과 건국이라는 창업의 어수선한 시기를 지나 정치 및 사회운영 메커니즘이 안정화되고 제도화되어가는 시기를 뜻한다.
수성기의 조선왕조에는 도전정신과 현상유지를 넘어선 제3의 길이 그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본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지키고
이루어' 가야 하는 것일까 ?
21. 수성의 지도자는 조직에 자기 지속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지속성을 지니면서도 끊임없이 자기 혁신을 거듭하여 발전해가는
생명체와도 같은 조직을 만드는 일이 그것이다.
한 마디로 지속적인 성장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수성의 군주는 세 가지 일을 수행해야 한다.
즉 하위체계 간의 내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과, 내부적인 긴장을 처리하는 방식의 세련화, 그리고 구성원들의
가치와 동기를 활성화하는 일이 그것이다. 한 마디로 '시스템'에 의해 국가가 돌아도록 해야 한다는 말인데 세종시대 사람들은 이를
권도의 정치에서 경도의 정치로 전환이라고 불렀다. 경상의 법인 정도를 정착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성 군주의 두 번째 목표는 '제도화'다. 앞에서 말한 경도의 정치란 결국 누가 그 자리에 있더라도 조직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곧 좋은 제도의 수립을 가리킨다. 이때 중요한 것은구성원들 스스로가그 원칙과 절차의 가치를 인정하고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강제와 위압이 아닌 토론과 비전을 통한 국가운영이 필요한 것이다.
세 번째 목표는, 인재를 기르고 고르게 사용하는 일이다. 창업기의 군주는 비교적 비슷한 생각을 가진 '동지'들을 요직에 배치해
혁명과 건국의 과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해내는 데 치중한다. 이에 비해 수성기의 군주는 가능한 한 이질적인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등용
해야한다. 세종이 황희를 중용했던 것 처럼, 수성의 군주는 자신의 정적까지도 포용해 국민 통합을 이루어내는 한 편 이질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등용하여 그야말로 이질적인 신민들의 뜻을 묶어내야 한다.
어전회의라는 용광로에 넣어 새로운 정책이라는 합금을 만들어내곤 했다.
22. 창업에 기여한 공신들을 존중하여 그들을 소회시켜서도 안 되지만, 새로운 시대가 요청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23. 수성의 지도자는 중용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스스로 '수성의 군주'를 자임한 세종은 수성기에 군주가 피해야 할 것으로, 큰 공을
세우려 하는 것과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24.세종의 정치 내지 리더십의 원천
1) 초인적인 자기 통제력
가급적 큰일을 벌이지 않으려 애쓰는 한편 놀이나 여색에 빠지지도 않았다. 국왕이지만 발언을 최소화함으써 신하들의 의견을
최대한 많이 듣는 모습을 보였다.
2) 인재를 기르고 적재적소에 배치
3) 숙의(熟議)의 정책결정 방식이다. 신료들의 의견은 물론 일반 백성들의 여론까지도 수렴했다. 여론조사의 이면에는 백성들의
'의향'을 근거로 개혁반대를 물리치려는 세종의 의도가 있었다. 이를 통해 국왕의 재량권을 넓히려는 세종의 현실 정치적 고려도
있었다.
4) 실용적 사대외교를 통한 국익의 확보
- 총론해서 말하자면, 세종의 정치는 한 마디로 "백성들의 평범한 생활을 위한 비범한 노력" 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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