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쳐야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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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열광케 한 지적, 예술적 성취 속에는 열정과 광기가 숨어 있다.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허균, 이덕무 등 18세기 조선의 지식인. 이들은 당대의 마이너였으나 그들만이 가질 수 있었던 열정과 광기로 말미암아 일가(一家)를 이룰 수 있었다.
자신들이 세운 뜻을 위해, 송곳으로 귀를 찌른 이도 있었으며 굶어죽은 천재도 있었다. 미치지 않고선 이룰 수 없었던 그들의 열정적 생애는 오늘날에도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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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마치지 못한다. 세상에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큰일이란 없다. 학문도 예술도 사랑도 나를 온전히 잊는 몰두 속에서만 빛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 한 시대를 열광케 한 지적, 예술적 성취속에는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광기와 열정이 깔려있다.
2. 절망 속에서 성실과 노력으로 자신의 세계를 우뚝 세워올린 노력가들, 삶이 곧 예술이 되고, 예술이 그 자체로 삶이었던 예술가들,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세워 한 시대의 앙가슴과 만나려 했던 마니아들의 삶 속에 나를 비춰보는 일은, 본받을 만한 사표(師表)도, 뚜렷한 지향도 없어 스산하기 짝이 없는 이 시대를 건너가는데 작은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남이 미치지 못하는 경지에 도달하려면 미치지 않고는 안된다. 미쳐야 미친다. 미치려면 미쳐라. 지켜보는 이에게 狂氣로 비칠 만큼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미친듯이 몰두하지 않고는 결코 남들보다 우뚝한 보람을 나타낼 수가 없다.
4. 비록 작은 기예라 해도 잊은 바가 있은 뒤라야 능히 이룰 수가 있거늘, 하물며 큰 도이겠는가 ?
5. 얻고 잃음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잊는다(忘)는 것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을 해서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될지, 출세에 보탬이 될 지 따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냥 무조건 좋아서, 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한다는 말이다.붓글씨나 그림, 노래 같은 하찮은 기예도 이렇듯 미쳐야만 어느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러니 그보다 더 큰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미쳐야 할 것인가 ?
6. 부족한 사람은 있어도 부족한 재능은 없다고 했다. 부족해도 끊임없이 노력하면 어느순간 길이 열린다. 단순무식한 노력 앞에는 배겨날 장사가 없다. 되풀이해서 일고 또 읽는 동안 내용이 골수에 박히고 자라, 안목과 식견이 툭 터지게 된다. 한 번 터진 식격은 다시 막히는 법이 없다. 한 번 떠진 눈은 다시 감을 수가 없다.
세상에는 여러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 번 척 보고 다 아는 천재도 있고, 죽도록 애써도 도무지 진전이 없는 바보도 있다. 정말 갸륵한 이는 진전이 없는데도 노력을 그치지 않는 바보이다. 끝이 무디다 보니 구멍을 뚫기가 어려울뿐, 한 번 뚫리게 되면 크게 뻥 뚫린다. 한 번 보고 안 것은 얼마 못 가 남의 것이 된다. 피땀 흘려 얻은것이라야 평생 내것이 된다.
7. 함부로 몸을 굴리고,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청춘을 탕진한다. 무엇이 좀 잘된다 싶으면 너나없이 물밀듯 우루루 몰려갔다가, 아닌듯 싶으면 썰물 지듯 빠져나간다.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싫은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어하고 칭찬만 원한다. 그 뜻은 물러터져 중심을 잡지 못하고, 지킴은 확고하지 못해 우왕좌왕한다. 작은것을 모아 큰 것을 이루려 하지 않고 일확천금만 꿈꾼다. 여기에서 무슨 성취를 기약하겠는가 ?
8. 굽은 나무 아래선 쉴 수가 없고...
하지만 오늘 그가 나를 압도하는 대목은 호한한 독서와 방대한 저작이 결코 아니다. 그 처절한 가난 속에서도 맑은 삶을 살려 애썼던 그의 올곧은 자세가 나는 무섭다.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만년의 별 실속 없는 득의거나, 그 많은 임금의 하사품이 아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고, 알아줄 기약도 없는 막막함 속에서도 제 가는 길을 의심치 않았던 그 믿음이 나는 두렵다.
차라리 백 리 걸음 힘들지라도
굽은 나무 아래선 쉴 수가 없고
비록 사흘을 굶을지언정
기우숙한 쑥은 먹을 수가 없네
그는 이런 시를 읽으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다. 이런 무모한 인내와 자기확신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
그 처참한 가난과 신분의 질곡 속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았던 맹목적인 자기 확신, 독서가 지적 편식이나 편집된 욕망에 머물지 않고 천하를 읽는 경륜으로 이어지던 지적 토대, 추호의 의심없이 제 생의 전 질량을 바쳐 주인 되는 삶을 살았던 옛사람들의 내면 풍경이 나는 그립다.
9.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그저 하고 대충 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하다 혹 운이 좋아 작은 성취를 이룬다 해도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노력이 따르지 않은 한대의 행운은 복권 당첨처럼 오히려 그의 인생을 망치기도 한다.
불광불급이라 했다. 미치지 못하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미쳐야 미친다. 미치려면(及) 미쳐라(狂). 지켜보는 이에게 광기로 미칠 만큼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미친 듯이 몰두하지 않고는 결코 남들보다 우뚝한 보람을 나타낼 수가 없다.
10. 조선의 18세기에는 이런 광기로 가득 찬 시대였다. 이전까지 지식인들은 修己治人, 즉 자기가 떳떳해야 남 앞에 설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는 무자기(毋自欺) 공부, 마음이 달아나는 것을 막는 구방심 공부에 힘을 쏟았다.
11. 홀로 걸어가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왕왕 벽이 있는 자만이 능히 할 수 있다" 고 박제가는 힘주어 말한다. 미치지 않고는 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홀로 걸어가는 정신이란 남들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출세에 보탬이 되든 말든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정신이다.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이것저것 따지기만 해서는 전문의 기예, 즉 어느 한 분야의 특출한 전문가가 될 수 없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 바로 벽이다.
12. 우연히 왕희지과 같게 써진 글씨에 제가 취해서 과거 답안지를 차마 제출할 수 없었던 최흥효, 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와중에 저도 몰래 눈물을 찍어 새를 그리던 이징,
모래 한 알로 노래 한 곡을 맞바꿔, 그 모래가 신에 가득 찬 뒤에야 산을 내려온 학산수,
이들은 모두 예술에 득실을 잊고, 영욕을 잊고, 사생을 잊었던 사람들이다.
한 시대 정신사와 예술사의 발흥 뒤에는 이처럼 한 분야에 이유없이 미치는 마니아의 존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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